백순실의 작품세계



신항섭 
미술평론가 

문화읽기의 요점은 양식이나 형식보다는 그 기저를 이루는 정신성을 들여다 보는데 있다. 물론 문화는 양식이나 형식의 옷을 입는다. 그러므로 그 정신성을 간파하기 위해서는 양식이나 형식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만 한다. 양식 및 형식은 결코 우연적이거나 자연발생적인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필연성이 내재하기 마련이다. 예술가들이 전통적인 문화에 관심을 갖는 것은 그 문화를 움직이는 실체로서의 정신적인 가치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려는데 있다. 예술이란 궁극적으로 양식이나 형식을 통한 정신적인 가치의 실현에 있는 까닭이다. 

 

백순실은 창작행위 이것에 우리의 전통문화에 대한 이해를 통해 예술의 정신성을 구현코자 한다. 이같은 방법은 창작행위 그 자체를 통해 양식 및 형식을 만들고 정신적인 가치까지 실현하려는 일반적인 태도와는 사뭇 다르다. 이 같은 태도는 그가 추구하는 예술적인 가치로서의 정신성이란 우리의 전통문화 속에 면면히 흐르는 민족적인 정서와 동일한 것으로 보는 데 연유한다. 결과적으로 예술이란 문화의 양식화 및 형식화와 다르지 않다는 인식이다. 예술은 그 민족의 문화적인 얼굴에 다름없다는 인식이야말로 백순실이 지향하는 창작세계의 출발점이다.

 

백순실은 화가이기에 앞서 다인茶人이다. 다도茶道를 생활화하고 있다. 다도를 생활화하는 것이 무슨 대수랴만, 현실적으로 그 의미를 깊이 이해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점에서 애기될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다도는 우리의 전통적인 정신문화라는 의미에서 다인 백순실의 이미지는 중요하다. 다도에는 형식이 있다. 형식은 곧 규법과 같은 것이다. 물론 ‘사회적인 의미에서의 규범’과는 다르지만, 단순히 차를 음용飮用하는 데 그치지 않는 형식적인 절차를 중요시한다. 그 절차가 차의 정신성, 즉 다도茶道를 성립시키는 요인이기 때문이다.

 

백순실은 다인으로서의 생활이 가져다 주는 의미를 곧바로 창작의 에너지로 전화轉化한다. ‘동다송東茶頌’이라는 작품의 명제가 말하고 있듯이 그는 차 예찬론자이다. ‘차를 노래하는 그림’이 백순실의 작품이며 그 내용을 이룬다. 이렇게 접근하면 그의 작품세계는 의외로 아주 빠르게 우리의 미감 및 미의식을 불러일으킨다. 구체적인 형태가 없는 비구상, 또는 추상언어임에도 불구하고 결코 난해하지 않은 표정으로 손짓한다. 그렇다. 그의 그림은 차에 대한 찬미라고 할 수 있다. 그림의 모든 이미지는 차에서 비롯되고, 또 차로 귀결한다. 하지만 그 이미지는 차에 대한 시각적인 이해가 가능한 실제의 형태에서 추출되고 있지는 않다. 실제를 여과해서 얻은 차맛과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차와 직접적인 연관성을 가지면서도 실제로서의 찻잎이라든가 차나무 또는 차밭 등의 구체적인 형태로부터 곧바로 차용되는 이미지는 아닌 것이다.

 

그의 ‘동다송’ 은 차맛이라든가 차향(香), 그리고 다도를 통해 감득하게 되는 정신적인 고양高揚등에 대한 환희심을 노래하는데 있다. 그러기에 구체적인 형태는 은유되거나 암시된다. 그의 작품은 내적 감정이나 무의식 또는 잠재의식의 표출이라는 일반적인 추상화의 조형개념과는 분명히 다르다. 체험적인 인식에 따르는 까닭이다. 따라서 그것이 추상적인 이미지일지라도 우연적인 표현은 억제된다. 세부적으로는 한지와 수성 물감이라는 재료적인 특성, 즉 물성物性에 의한 우연적인 표현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의도적인 이미지에 의해 장악된다.

 

그의 작품은 언제나 다양한 이미지를 통합하는 강한 작가의식에 의해 통제된다. 점 하나일지라도 돌발적인 감흥에 맡기지 않는다. 표현되는 모든 이미지는 그의 명료한 의식에 의해 놓여진다. 이렇듯 철저하게 화면을 장악하는 경우도 흔치 않다. 아마도 그것은 역시 차생활을 통해 몸에 익힌 균형감각과 평정심 때문이 아닐까. 차생활은 청결한 의식을 유도한다. 마음을 투명하게 밝히고 정신을 꼿꼿하게 세우는데 유효하다. 차를 음미하려면 자극적인 것을 피해야 한다. 물론 감정을 절제하기 위해서이다. 차생활은 감정을 조율할 수 있는 균형감각을 키워준다.

 

그는 이렇듯 차생활을 통해 얻은 정신적ㆍ감정적인 평균을 위에서 작업을 한다. 그렇다고 해서 선화禪畵와 같은 구도자의 그림을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욱 철저한 직업적인 그림을 그리고자 할 뿐이다. 직업적인 그림, 그것은 조형성에 대한 탐구이다. 포름과 색채와 구성으로 짜여지는 비형태적인 추상세계를 탐닉한다. 거기에서는 조형적인 순수성이 요구된다. 그 순수성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조형언어 및 조형어법을 탐색하는 것이다.

 

그가 차를 노래하기 시작한 것은 10여 년 남짓, 가정생활로 인해 오래 묵혀두었던 붓을 다시 잡은 시간과 거의 때를 같이한다. 1987년도 작품 <동다송 87017>은 차茶에 대한 그의 관념을 투사시키고 있다. 찻잎을 연상케 하는 무수한 점들이 수없이 겹쳐지면서 빛의 강약을 느끼게 하는 수묵작업이었는데 미망에서 깨어나는 그 자신의 의식세계를 읽을 수 있는 작품이었다. 형식상으로는 분명히 순수 추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찻잎과 같은 균일한 크기의 점과 새순처럼 삐치는 짧은 선들이 어우러지는 이미지 속에서 실제적인 차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설령 그로서는 그 점과 선이 실제의 찻잎을 의식한 것이 아닐지라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찻잎을 연상케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당시 그의 미의식이 가지고 있는 단층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었다.

 

차에 대한 생각과 깊이가 일반적인 시각에서 크게 진전한 상태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이후의 작품들에서도 점과 선은 거의 일관되게 나타난다. 하지만 그 점과 선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그 모양을 달리하게 된다. 이 같은 변화는 차에 대한 인식의 깊이, 그리고 오랜 차생활에서 오는 체험의 무게, 또한 평정심에 이끌리는 감정의 밀도와 관련이 있다. 감각적인 이미지에서 이성적이면서 의식적인 이미지로 바뀌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의 그림에서 읽히는 이미지의 기본 단위는 언제나 점과 선이고, 이를 근거로 하여 색반이나 색면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보면 그의 ‘동다송’은 점ㆍ선ㆍ면ㆍ색채ㆍ색면ㆍ포름 등의 조형적인 기본 요소들만으로 꾸며지는 순수 추상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무언가 시각적인 이해가 가능한 구체적인 형태를 지양한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으나 마치 실재를 보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히도록 하는 것이 그의 작품이 가지고 잇는 시각적인 이해의 범위이다.

 

이같은 시각적인 이해의 범위를 제시할 수 있는 것은 허상을 쫓는 일반적인 조형개념의 추상회화와는 다른 관점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명확히 하려는 것이다. 그렇다. 그의 그림은 비록 순수 추상언어를 사용하고 있으나 구조적인 힘을 느낄 수 있다. 감정의 자유로운 발설이거나, 잠재의식 또는 무의식의 표출이 아니다. 그의 작업은 언제나 명료한 의식 속에서 진행된다. 미의식의 지배하에서 전개되는 표현행위와 그 행위를 자극하고 충동하는 미감은 엄격한 조형적인 질서 속에 놓인다. ‘엄격한 조형적인 질서’가 다름아닌 ‘구조적인 힘’을 이끌어내는 요인이다.

 

백순실의 작업에서 중요시되는 부분은 포름이다. 포름은 추상적인 언어를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이다. 그의 작업에서 포름은 형식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팽팽한 시각적 긴장을 일으키는 원색과 무채색의 색면에 의해 전체상을 형성해 가는 그의 작업방식에서는 공간을 규정하는 형태로 포름이 존재하는 것이다. 87년작 <동다송 87017>에서는 포름이 명확한 형태로 나타난 것은 아니었지만 전체상에서는 수묵의 농담의 변화 속에서 포름에 대한 의지가 반영되고 있었다. 그 이후의 작업에서는 색면의 형태로 또는 기하학적인 이미지의 형태로 포름이 구체화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의 작업에서 포름은 순수한 단일 색면에 의한 공간구성이라는 평면적인 해석을 뛰어 넘는다. 앞서 말한 점ㆍ선ㆍ면ㆍ색면 등의 조형적인 요소들이 화면 전체에 골고루 분산되는, 다층 구조의 포름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의 작업에서 포름은 ‘시각적인 이해의 범위’를 설정하는데 기여한다. 이때 포름은 색면구성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는 시각적인 이해에 큰 도움을 준다. 구성적인 이미지는 대면대비와 포름의 상호작용에 의해 일어나는 선명성을 이끌어 내는 까닭이다. 때로는 기하학적인 면분할의 형태로 주어지는 포름은 추상언어가 표현할 수 있는 미적 쾌감을 가장 빠르게 전달한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방법이다. 그래서일까. 기하학적인 면분할에 의한 포름은 아주 조심스럽게 이용된다. 그러나 필요한 경우에는 대담한 방법으로, 그리고 직설적으로 표현된다.

 

름과 결부되어 나타나는 색채 이미지는 시각적인 이해의 틀을 형성한다. 그의 작품은 수묵을 재료로 하면서 분말 형태의 광물성 재료를 혼용하고 이를 한지 위에 정착시키기 위해 접착용제를 용한다. 색채 재료는 기본적으로 분채에서부터 아크릴 칼라라든가, 판화용으로 쓰이는 해먹, 심지어는 커피까지 다양하다.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필요한 재료라면 제한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그의 작업에서 색채 이미지는 ‘동다송’의 내적 의미에 응답하는 깊이감을 가지면서도 한편으로는 감성적인 표현이 주는 아름다움을 극대화시키기도 한다. 무채색의 원색의 극단적인 대비가 만들어내는 극렬한 이미지에서 새삼 회화적인 색채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된다. 안으로 잠겨드는 무채색과 외부로 발산하는 원색의 긴장관계를 미적 쾌감으로 제시하는 작품은 느슨한 의식을 팽팽하게 조여주는 데 기능한다. 추상회화가 가지고 있는 미적 감각의 순수성이 무엇인지를 일깨워 주는 경우이다.

 

반면에 원색적인 색채가 억제되는 작품에서 색채 이미지는 또다른 의미를 가진다. 무채색으로만 처리되는 경우, 대부분 의식의 심화로 연결된다. 유채색이 감각 또는 감정을 일깨운다면 무채색은 감각 및 감정을 가라앉힘과 동시에 의식의 눈을 뜨게 한다. 의식의 개안은 정신을 명료하게 밝힌다. 맑은 정신은 세상을 투시한다. 구도자들이 참선이라든가 명상의 방법으로 정신의 투명성을 구현하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색채를 잠재움으로써 의식이 맑게 일어서는 원리를 그는 다도에서 터득하고 있는 것이다. 무채색으로 처리되는 작품은 의식의 투명성을 보여준다. 인간의 감정이 침잠하게 되면 그 위로 의식이 깨어나게 된다. 의식의 표현수단은 사색이나 사유로써 제시되는데, 감정이 억제된 땅 위에서 발아하는 것은 필경 의식이다. 무채색은 감성보다는 이성에 의해 통제되므로 자연히 시각적인 이해가 어려워지게 된다.

 

그는 때로는 감정을 거의 걸러낸 차가운 이성적인 색채 이미지를 보여 준다. 그러나 찬찬히 뜯어보면 이성의 지배하에 있는 무채색의 땅에서 무언가 꼬물거리는 생명체의 감성언어가 숨은 듯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역시 감성언어의 소유인 점과 선ㆍ색ㆍ색반 등의 표현적인 이미지들이다. 이와 같은 감성적인 생명력을 지닌 표현적인 이미지들이야말로 그의 작업을 말없이 떠받치는 단위 원소이다. 회화적인 표현으로서의 최소한의 단위 물질이 되는 점과 선과 색반은 백순실의 작품을 형성하는 발단이자 궁극이다.

이 같은 단위 원소들이 이합하고 집산하면서 포름을 유도하고 공간구성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런데 최근 작업 경향은 이같은 표현적인 단위 원소들이 무언가 보다 구체화된 이미지를 의식하는 듯한 지향성을 띠고 있다. 현상계의 무엇을 닮으려는 적극적인 의사를 나타내는 경우도 없지 않다. 감정의 표현이거나 의식의 산물이라는 기존의 존대 방식을 벗어나 대지大地와 유사한 현상적인 이미지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혐의가 짙다.

 

실제로 판화작업인 <대지의 노래 9523>에서 그 명제가 시사하듯이 생명을 키우는 대지 등 직접적인 표현대상을 설정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구체적인 형태에 대한 복원의지라기보다는 생명의 근원으로서의 땅이 가지고 있는 내적 의미에 대한 관심의 표명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제 그의 회화적인 관심은 조형의 순수성을 탐색한다거나 다도가 밝혀주는 정신세계의 현현現顯으로부터 보다 실제적인 생명의 문제로 전이되고 있음을 말해 준다.

 

차생활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생명활동의 지엽적인 문제에 불과한지 모른다. 감정의 절제, 의식의 개안 따위도 바로 생명활동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그의 미의식이 차를 생성케 하는 근원으로서의 땅, 즉 대지의 존재의미로 이동하는 것은 거의 필연적인 일이 아닐까. 찻잎과 차나무를 발아시키고 성장시키는 대지의 이미지(힘)는 차를 대상으로 하였듯이 또다른 의미에서의 차에 대한 접근인 셈이다.

 

백순실은 단순히 차만 즐기는 것이 아니라 차밭의 순례라는 새로운 방법을 택하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차밭 순례는 중국으로까지 이어진다. 차밭의 실체를 직접 본다는 것은 과정을 모른 채 단순히 오감으로 차를 탐닉하는 데서 결과하는 허상을 실체화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보아야 한다. 체험은 인식의 명확성을 보조한다. 차밭을 순례하는 과정에서 그는 비로소 차를 만들어내는 대지의 살아있음, 즉 땅의 생명력을 감지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대지의 이미지가 도입되기에 이른 것이다.

 

대지의 이미지는 비록 추상적인 언어로 표현되고 있을지언정 실제에 대한 해석이므로 대상성이 강하게 느껴진다. 갈색조의 색채 이미지도 그러하거니와 거기에 점점이 자리하는 청색 미지의 명쾌한 존재감은 대지에 뿌리를 내리는 생명현상으로 이해된다. 생명에 대한 새로운 의식은 때로 형태를 지향하려는 의지가 강한 선들의 단편을 통해 식물(찻잎을 연상케 하는)의 부분적인 이미지를 불현듯 떠올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 같은 이미지는 물상의 온전한 형태가 되지는 못한 채 단지 실제물의 파편처럼 산재해 있을 따름이다. 그래도 그 같은 작품은 눈에 읽히는 그 무엇이 있다는 점에서 흥미를 불러 일으킨다. 극도로 억제돼 온 형태에 대한 금기가 깨어지고 있지 않느냐 하는 호기심을 유도하는 것이다.

 

실제로 설치작업에서는 오브제가 등장함으로써 구상 언어의 부분적인 차용을 거부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무언가 물질을 매개로 할 수 없는 설치작업의 특성 때문이라고는 하더라도 작품 ‘대지의 노래’에서 호미라는 농기구의 직접적인 제시는 추상작업에서 맛볼 수 없는 시각적인 충격이 되기에 층분하다. 그것은 은유적이거나 암시적인 내의성으로부터 상징성으로 표현방법을 전환한 것일 수 있다. 흙과 호미는 농업을 상징하고 이로부터 차밭을 연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차를 생성케 하는 땅, 즉 대지의 이미지로 옮겨온 이후 그의 의식은 이렇듯 실제화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1993년 공평아트센타 개인전에 출품된 설치작업은 차에 대한 광의적인 해석을 담고 있었다. 땅과 마찬가지로 차를 생성케 하고 성장하는 데 필요한, 자연현상에 관련한 이미지를 영상화함으로써 참선이나 명상에 따른 정신적인 영역을 보여주었다. 이는 다도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정신적인 고양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인 것이다.

 

그의 ‘동다송’은 차에 대한 찬미이자 숭배이다. 하지만 맹목적이 아니라 차가 지닌 정신적인 가치와 실제적인 가치를 규명하고, 그 근원에까지 실증적인 방법으로 접근하여 ‘차를 노래하는’이유를 선명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자신은 다도를 통해 감화된 미의식 및 미감이 생산해 내는 결과물로서의 작품이 다른 작가들의 작품과 다른 시각에서 이해되기를 바라고 있다. 다도가 회화적인 소재 및 대상이 되었을 때 회화적인 가치로서, 아니 미술로서의 가치가 어떻게 평가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바로 ‘동다송’의 시작이다.

 

정신이 없는 육체는 허상이다. 정신성이 담기지 않은 그림 또한 허상일 수 밖에 없다. 깨어있는 의식이 개재되어야만 예술작품으로서의 생명력이 비롯되는 것이다. 백순실의 작업은 정신 및 행동의 수양을 덕목으로 하는 전통적인 다도, 즉 차생활의 결과물이다. 그는 결과적으로 정신수양의 한계를 넘어 다도의 근원으로서의 대지와 자연으로까지 의식의 폭을 넓힘으로써 생명현상을 일으키는 자연의 보이지 않는 힘의 존재와 접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다도 그 자체에 그치지 않는 보다 광범위한 의식의 전개를 체험하고 있다. 대자연의 힘과 그 힘에 의해 실제화하는 생명의 실체를 보면서 미술 또한 인간을 감화시킬 수 있는 어떤 힘을 내부에 축적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깨달음을 얻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그는 조형적인 해석의 개별성은 물론이요, 깨달음의 미학을 탐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