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다송과 여백의 맛



윤진섭 
미술평론가 

우리에게 『東茶頌』으로 널리 알려진 작가 백순실이 최근 강남에 문을 연 판화전문화랑 『갤러리 고도』에서 판화전을 갖는다. 갤러리 고도의 기획·초대로 마련된 금번 판화전은 작년 말과 금년 봄에 『국제 그래픽 아트센터』와 『MGC 그라덱』(이상 루블리아나와 자그레브 소재), 그리고 『International Centre for Modern Art』(이태리)에서 각각 열렸던 대형 기획전에 연이어 개최되는 전시회란 점에서 매우 뜻 깊은 행사라 여겨진다. 그 이유는 첫째 석판화와 동판화가 주축을 이루게 될 금번 전시회의 출품작들이 종래의 채색화와는 또 다른 백순실 판화 특유의 예술적 향취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요, 둘째, 그럼으로써 그의 판화들은 회화작품과는 다른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판화의 대중적 보급에 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판화가 지닌 이와 같은 매력은 요 근래 우리사회에 두터운 계층을 형성하기 시작한 중산층의 미적 취미 만족과 나아가서는 생활공간의 실질적인 장식이라는 문제와 결부되면서 그 효용이 점점 더 초래되고 있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최근 들어 판화의 대중적 보급이란 차원에서 문을 여는 판화전문화랑이나 공방이 점차 늘고 있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라 아니할 수 없다.
 
백순실은 색채화가이다. 채색을 주로 다루는 그는 발색과 화면의 공간배치에 매우 뛰어난 감각을 보이고 있다. 특히 그가 지닌 가장 두드러진 재능 가운데 하나는 자신의 화의(畵意)를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해 내는데 정통하고 있다는 사실인데, 그의 이와 같은 재능은 부단한 수련을 통하여 최근에는 보다 완숙한 경지로 들어서고 있다.
 
 『東茶頌』이라는 제목은 실제 그의 작품내용과는 이렇다 할 관련이 없어 보인다. ‘차(茶)를 찬미하는 노래’ 정도로 새겨져 마땅할 이 제목은 오히려 생활철학이나 인격을 수양하고자 하는 그의 열망을 담고 있다. 실제로 그의 일상생활은 차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어서 좋은 차를 구하기 위해 그가 보이는 열성은 남다른 데가 있다. 말하자면 우리의 선인들이 시·서·화 일치를 주장한 것에 비해 그는 차(茶)와 그림(畵)의 일치, 혹은 생활과 그림의 일치를 이야기하고 있다고나 할까?
 
백순실 회화의 요체는 작품으로부터 물씬 풍기는 동양적 정서와 ‘書卷氣, 文字香’으로 대변되는 ‘문기(文氣)의 표출에 있다. 먹(墨)과 아크릴릭, 해먹, 규사, 과슈와 같은 서로 이질적인 재료간의 결합으로부터 발산돼 나오는 이 기운은 여타의 추상화와 백순실의 그것과를 분명히 가름하게 해주는 미적 특질이다. 추상화를 논할 때 우리는 그간 서구의 회화이론이나 서구의 미술사에 조회하여 견강부회식으로 해석하는 태도를 관례로 삼아왔는데, 백순실의 그림은 그와 같은 우리의 태도를 밀어내는 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
 
이를 테면, 우리가 서체적 추상회화의 대가라고 부르는 마크 토비가 동양정신의 진수를 배우지 못하고 일종의 회화적 방법론으로 서체를 원용한 것이라고 한다면, 예향의 본 고장인 광주에서 태어나 그곳의 독특한 분위기와 예술적 전통을 체감한 백순실이 풀어내는 추상화의 세계는 동양정신의 본원적인 예취(aura)를 담고 있다 할 것이다. 그의 작품이 보여주는 탈속한 듯한 기품과 오랜 수련의 산물인 분방한 운필, 파묵과 발묵의 조화와 함께 적재적소에 배치시킨 색면의 분할 따위는 발색을 고려해서 일어지는 순도 높은 색채감과 함께 『東茶頌』 연작이 지닌 뚜렷한 미적 특질들이다.
 
먹이 우려내는 유현(幽玄)한 맛과 중층적으로 가해지는 터치들의 배합, 수간색채처럼 종이 속으로 침투하는 것이 아니라 밑색 위로 뚜렷하게 떠오르는 아크릴릭과 과슈의 색채감은 각기 침잠과 은은함, 그리고 강렬한 느낌을 유발하면서 작품에 다채로운 표정을 부여한다.
 
백순실의 『東茶頌』 연작은 ‘중첩’과 ‘단순화’의 방법론에 기안을 두고 있다. ‘87~88년 무렵의 『東茶頌』 연작에 가장 뚜렷이 드러나고 있는 중첩의 방법론은 호흡이 짧고 예리한 필선들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마치 풀섶에 쌓인 솔잎처럼 리드미컬하게 중첩된 필선들을 배경에 드러내고 있다.
 
『東茶頌』 연작을 다년간 제작해오면서도 백순실은 한편으로 판화 작업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주로 석판과 동판화에 국한된 판화에 대한 그의 애정은 기계적인 공정에 따라 제작되면서도 예기치 않은 우연의 효과와 때로는 회화작품과는 다른 판화 특유의 맛에 매료되면서부터였다. 내용상으로는 회화작품의 연장선상에 있으면서도 백순실이 금번 개인전에서 선보이게 될 판화작업은 몇 가지 점에서 우리의 눈길을 끈다. 그 중에서 유독 눈에 띄는 것은 한지를 사용하여 석판화를 제작한다는 사실이다. 국내에서는 보기 드물게 초대형 석판 프레스를 사용하여 제작되는 금번 석판화작업은 여백의 미와 동판화 특유의 부식효과가 잘 어우러진 그의 동판작업과 함께 백순실 회화세계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주게 될 것이다. 특히 금번 판화전은 최근에 문을 연 『고도 판화 공방』과 작가가 혼연일체가 되어 이룩해 낸 실험적 결과라는 사실 또한 이 자리를 빌어 밝혀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