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로부터 배태된 동양의 정신성



장동광 
독립 큐레이터 

백순실이 3년여 만에 발표하는 근작들에는 회화의 벽(壁)을 넘어서려는 지난(至難)한 의지가 서려있다. 한국화와 서양화라는 지역적, 문화적 접근방법에 의한 장르구분은 이미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맥락이 아니다. 대지의 정기, 동시대의 미의식, 생활의 정서, 한국의 소리와 같은… 어쩌면 지극히 나지막하고 소박하기도 한 이러한 예술적 견해들이 백순실의 회화를 떠받치고 있는 저, 땅 속 깊은 곳의 광활한 뿌리임을 알게 한다.
 
그간 백순실은 그가 오랫동안 놓치지 않고 있는 동다송(東茶頌)이란 작품제목 때문에 “차를 노래하는 작가”로 알려져 왔다. 사실 차는 작가의 일상에서나 작품제작의 동기에서나 빼놓을 수 없는 작품해석의 중요한 근거가 되어왔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번 백순실의 근작을 통해서 이러한 견해는 새로운 관점에서 접근되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즉, 백순실의 회화는 한국의 토양에서 배태된 ‘정신주의(精神主義)’의 한 전형으로 보아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사전적인 의미로 이 정신주의는 ‘정신적인 사물의 근원적인 지배나 섭리를 믿는 철학적인 견지’로 정의된다. 다시 말하자면 백순실의 회화는 차를 예찬하고 있다는 단순, 피상적 차원보다는 오히려 차가 생성된 공간, 즉 한국 혹은 동양의 정서와 자연의식을 반영하고 있다는 보다 근원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 점과 관련하여 이번 백순실의 근작들에는 작가의 전환기적 국면을 반영하는 일말의 변화적 징후가 나타나고 있음은 지나칠 수 없는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우선 그는 이번 작품전을 준비하면서 대형 캔버스 작업의 경우 아크릴 칼라, 광물성 안료, 접착용제 등을 다채롭게 구사하고 있다. 밑바탕의 채색부터 작품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수 없는 반복적 덧칠과 날카로운 금속을 사용한 스크래치를 거듭한다. 이러한 행위의 이면에는 재료와의 순응과 저항에서 빚어진 물리적 흔적과 함께 작업의 프로세스, 즉 과정 그 자체를 화면에 그대로 노출시키려는 의도가 잠재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결과는 전반적으로 중첩된 색채와 암시적 기호들로 인해 어떤 지속적인 시간의 흐름을 감지하게 된다.
 
여기서 시간의 흐름이라는 문맥은 다른 의미로 ‘역사성’으로 치환할 수 있을 것 같다. 화면을 질주하고 있는 거친 표면질감은 마치 실제의 땅이나 혹은 오래된 회벽(灰壁)을 연상시킨다. 안에서 배어나오는 밑바탕의 색채와 형태는 다시 그 위에 그려진 마지막 단계의 색채, 형태와 서로 상충하는 듯하지만 동일한 토양에서 속해 있는 서로 다른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마치 인간사에 있어서 같은 피를 나눈 형제라 할지라도 서로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과 비견할 만하다. 여기서 백순실의 대지는 현존하는 시간의 의미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 배태되고 있는 인간의 삶, 생명의 원리, 대지에 얽힌 개인적 체험의 역사성이 투영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수 없는 반복적 과정을 통해 완결된 작업의 종착지는 어딘가 미완의 상태인 것 같고, 더 몰아 쉬어야 할 대지의 호흡이 남아있는 듯하다.
 
아마도 필자의 이러한 연상작용들은 1980년대 후반, 수묵작업에서 보여졌던 점과 선과 면의 율동적 구성에서 유추되었던 생동하는 기운을 기억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점에 관한 한 오래 전부터 동양과 서양의 재료를 자유롭게 구사해 온 전력(前歷)에 비추어 볼 때, 이번 연작들에서 한층 격렬한 빛을 발하고 있는 두터운 질감과 바탕색과의 투영관계는 그다지 새로운 것이 아닐런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순실은 몇 가지 의미로운 조형적 단서 혹은 변화적 징후를 남기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그것은 첫째 색채와 기호적 형태가 갖는 상징성이다. 화면에 간헐적으로 부유하고 있는 코발트 블루는 백순실이 즐겨 쓰는 색채이다. 그런데 이 색채는 갈색톤의 대지에 수평으로 날아다니거나 혹은 수직적으로 솟아 있는 것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이 코발트 블루의 상징성은 인간/하늘/생명의 싹으로 유추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사실 백순실의 화면을 채우고 있는 광활한 대지는 말없는 모성(母性)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모성애 혹은 모태적 의미로서의 백순실의 대지는 고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즉 생명과 자연의 섭리를 감싸 안는 넉넉한 사랑과 원초적 생명의 공간이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발산하는 빛의 코발트 블루는 다른 의미로 성장과 생명을 지속해 나가려는 자연의 기운(氣運)인 것이며, 또한 백순실의 삶에서 투영된 인간에 대한 사색이자, 예술가의 눈에 비친 삶의 환경에 얽혀 있는 군상(群像)들의 모습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500호 대형작품에서는 전반적으로 보아 과거의 작업이 산이나 대지 위에 펼쳐진 외경(外景)을 포착하는 것이었다고 한다면-보다 내경(內景)적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음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식물의 뿌리 혹은 자궁 속의 생명체를 연상시키는 기호적 형태들에서 원초적 생명에 대한 근원성을 탐색해 보려는 의도가 엿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1993년 개인전 서문에서 미술평론가 이용우씨가 “…오히려 그는 차의 향기보다는 그것을 키워내는 자연의 생명에 더 관심을 쏟고 차에 비유된 사회성, 차와 인간, 또는 삶의 카테고리에 관심을 표명하는 것이다. 그래서 차를 노래한다는 원래의 취지는 삶을 노래하는 것으로 주제의 변혁을 꾀하고 있다. …”라는 해석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다.
 
사실 백순실은 남도에서 태어나 그 풋풋한 정서와 함께 차의 은근한 맛과 질긴 생명력을실제적으로 체득하고 있는 작가이다. 그는 한마디로 지독한 작가의식과 끈끈한 정을 동시에 소유한 사람이다. 자신의 모든 일상은 작업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작업 외의 일은 가급적 삼가 하는 그야말로 다인(茶人)과 같은 구도자적인 삶을 지속하고 있다. 한가지 역설적인 점은 번잡한 방배동의 큰 길가에 있는 그의 작업실을 들어서면 차의 향기와 함께 자연의 소리 없는 반향이 적막한 산사(山寺)에 들어선 것 같은 기운을 자아낸다는 것이다. 이러한 환경이 백순실을 지배하고 있는 실존의 상황이다. 왜 이런 배경을 언급하느냐 하면, 생명의 잉태에 대한 경험은 바로 백순실에게 있어서 모태적 대지 혹은 기호적 의미를 해독하는 중요한 열쇠가 되리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백순실에게 있어서 내경으로 돌려져 있는 시선은 곧 생명의 잉태의 체험과 성장과정을 지켜본 한 여성으로서의 인식의 소산에 다름아닐 것이다.
 
둘째는 개념적이고 단순화된 형태적 요소들, 즉 기호의 도상학(圖像學)적 측면이 부각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간 백순실의 작업이 전면화(全面畵, All-Over Painting)의 경향 속에서 색채와 형태의 구성적 관계에 대한 탐색이 두드러졌다고 본다면, 최근의 작업에서는 무채색과 색면과의 대비, 그리고 기호적 형상들과 공간과의 관계가 새롭게 부상되고 있다. 무채색은 백순실에게 있어서 동양화의 수묵작업과 같은 여백의 공간감을 형성하고 있다. 서양적 재료가 가진 발산적 색채감을 중화시키는 요소로서 무채색은 그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셈이다.
 
백순실의 회화적 궤적을 조망할 때, 조형언어의 일관성을 벗어나 다양성을 구가하고 있는 작가라 할 수 있다. 그는 강렬한 원색의 변주적 화면구성과 침잠하는 명상적 분위기, 그 양자간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편이다. 이것은 하나로 통괄할 수 없는 다양한 표현방식이라는 점에서 그의 작업을 이해하는데 일종의 비무장지대로 여겨지기도 하는데, 역설적으로 바로 이 점이 백순실의 회화적 생명력과 조형의식의 부단한 긴장을 지속시킬 수 있는 에너지가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어쨌든 이러한 무채색의 여백공간은 안과 밖, 내재적 질서와 외재하는 형상간의 긴장관계를 긴밀하게 통합시키는 매개체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다소 미완의 상태인 것 같으면서도 중층적이고 불가해한 형상들은 곧 작가의 의식 속에 침잠해 있는 무의식의 표상들인 것이다.
 
좀 더 미시적으로 관찰하면 구름, 사람의 형상, 십자가, 식물의 잎과 줄기 같은 형상들이 화면 어딘가에 부유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붉은 점의 연결체적 기호들이 등장하기도 하는데, 이는 생명체의 단위 혹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물리적 생명의 질서를 그의 대지 안에 끌어들인 개념적 도상(圖像)들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개념적 도상들은 백순실에 있어서 하나의 조형적 질서와 균제감(均齊感), 혹은 파격적 요소로서 작용하는 일면이 있지만 총체적인 관점에서 ‘생명의 빛’을 탐색하려는 구도자적 조형의식의 현현(顯現)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백순실의 근작들에서 드러나는 이러한 특징들은 그가 서서히 동양의 관조적 정신성을 서양적 조형어법을 통해 보편적 감수성을 획득하려는 의지로 비쳐지는 명확한 징후들이다.
 
끝으로 백순실은 회화를 하나의 완결된 결정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미완의 정서적 매개체로서 보고 있다고 생각된다. 다시 말해서 그는 자연의 실체를 재현하거나 관조적으로 들여다 보는 차원에서 벗어나 자연의 내면 속에서, 그 생명현상의 질서를 탐색하려는 것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이다. 이것을 달리 동양의 정신주의의 발로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의 회화에서 우리는 평정의 상태 혹은 무심의 경지에서 우러나오는 미완의 여백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한 점에서 백순실의 이번 근작들은 우리에게 감상자의 정서나 미적 감응에 의해 작품이 궁극적인 완성에 도달할 수 있다는, 마치 대지를 뚫고 일어서는 싹처럼 어떤 ‘미완(未完)의 미’에 관한 미학적 사색을 던져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