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원을 향한 일상



김은영 
미술이론, 홍익대 강사 

오늘날 많은 작가들이 자신의 일상에 대해 다룬다. 그들의 작품에는 주로 그들이 스쳐 지나가는 일상 속의 정물과 풍경 또는 그들을 둘러싼 환경과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백순실이 30여년 간 지속해온 동다송(東茶頌) 연작 또한 작가의 일상에 기반한다. 매일 차와 커피를 마시는 반복적인 행위와 그 안에 담긴 철학적인 의미 그리고 나아가 그가 ‘마시는’ 일상의 재료를 ‘그리는’ 그림의 재료로 사용하기까지 백순실의 작품에 체화된 일상은 보다 감각적이고 찰나적인 일상을 다루는 동시대 작가들의 그림과는 다른 시각적 언어를 구사한다.
 

백순실의 그림은 추상적이다. 갈색, 황금색, 또는 회갈색의 두터운 질감의 바탕 위에 주로 흑백의 유기적인 형상들이 부유하듯 떠다니거나 점점이 심어져 있다. 그러나 이내 거친 질감과 갈색조의 바탕화면은 흙바닥이나 갯벌을 연상하게 하고 그 위에 그려진 형상들은 꽃봉우리, 마른 나뭇가지, 씨앗 같은 자연의 형태를 떠올리게 한다. 찻잎을 우려 마시고 커피를 추출하여 그 맛을 음미하고 향과 색을 즐기는 일상적 행위 속에서 작가는 작은 찻잎과 커피콩이 물리적으로 연유한 땅의 생명력으로 일상의 초점을 확대한다. 사회경제적 변화의 흐름에 함께 흔들려 온 일상의 옆길에서 몇 천만 년간 변함없이 생명을 길어 올린 대지의 힘을 담아내고 대지의 인상을 표현하는 백순실의 동다송은 생명이라는 근원적인 주제를 다루며 일차원적이고 일시적인 경험과 현상들에 경도되어 있는 오늘날의 많은 그림들에 큰 무게감을 더하고 있다.
 

백순실은 재료에 충실한 작가이기도 하다. 작업과정의 90%를 바탕화면에 쏟아 붇는 그는 다양한 소재의 재료들을 혼합하여 수십 번씩 바르고 마르고를 반복하며 캔버스 위에 물감을 켜켜이 쌓아 올린다. 거친 질감을 위해 다양한 크기의 화산석을 물감과 더불어 바르고 커피를 추출하여 물로 몇 번씩 얼룩을 낸 바탕화면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온갖 표정을 지니고 있는 흙밭과 비슷해진다. 여기에 어릴 적 흙바닥에 엎드려 나뭇가지로 드로잉을 하듯 작가는 때로 서체적인 붓터치와 간단한 형상을 남기며 깊이 있는 바탕과 최소한의 단순한 형상들로 생성의 화면을 구성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최근 그의 작업실이 자연에 더욱 가까운 곳으로 이주하면서 그의 작품에서 자연적인 형상은 이전보다 더욱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흙과 풀의 냄새, 촉감을 풍부하게 느낄 수 있는 일상의 환경은 그로 하여금 보이는 형상보다는 보이지 않는 생명의 느낌을 표현하는 바탕화면에 집중하게 한 듯하다. 커피, 매트 미디움(matt medium), 화산석, 아크릴, 분채, 오일바, 석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재료에 대한 끊임없는 실험으로 최근 백순실의 동다송 그림은 다른 어느 캔버스보다도 땅의 표정, 대지의 생명력을 밀도 있게 담아내고 있다.
 

30년 넘게 일관되게 차와 대지를 노래해 온 백순실에게 영원히 질리지 않을 기적과도 같은 생명현상의 근저가 되는 땅에 대한 연가는 아직도 수많은 변주로 연주될 여지가 풍부하다. 땅에 보다 가까워진 삶을 살아가고 있는 작가가 앞으로 자신의 일상과 결합된 어떤 표정의 생명의 대지를 표현하게 될지 기대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