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소리, 들리는 색



이선영 
미술평론가 

음악은 어떤 이미지를 발생시키고, 또한 음악이 흐르는 듯한 이미지가 있다. 소리는 이미지를, 이미지는 소리를 자극하며 상호 번역되는 것이다. 클래식 음악으로부터 출발한 백순실의 이번 전시는 감각들 간의 상응과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장이다. ‘시청각’이라는 표현이 있듯이 시각과 청각은 매우 가까이에 있으며 서로를 끌어들이곤 한다. 시공간이 하나이듯이 시간예술인 음악과 공간예술인 회화는 서로를 함축할 수 있다. 작가는 수 십 년 동안 판화 뿐 아니라 200호 크기의 대작을 다수 포함하여 음악에 대한 그림을 200여점 그려왔고, 이 전시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시청각의 상호조응은 단지 음악을 그림의 소재로 삼은 피상적 소재주의를 넘어선다. 양자는 보다 깊은 차원에서 서로에 대해 반응한다. ‘Ode to Music- ’로 시작되는 작품 제목에는 작품의 소재가 된 곡명이 함께 적혀있지만, 음악자체가 추상인 한 그 해석은 무한대이다. 이번 전시에서 음악과 미술의 링크는 엄밀하면서도 자유롭다. 그것은 음악을 그림으로 재현한 것이 아니라, 음악에 영감 받아 새로이 생성된 무엇이다.
 

작가는 대상에 매이지 않는 그림만큼이나 음악에 매이지 않으려 한다. 작가는 클래식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으면 알만한 주옥같은 곡들을 주관적으로 듣고 전체적으로 반응한다. 시간 속에서 생겨났다 사라지는 소리는 그림이라는 공간적 형식에 내려앉을 때, 추상1에서 추상2로의 이동이 일어나지만, 각 곡에 대한 탐구적 자세는 비슷한 시각 상을 가지는 장식으로의 환원을 피해간다. 곡은 작가의 몸을 통과하면서 각기 다른 해석을 낳기 때문이다. 같은 곡도 연주자에 따라서 청취자의 상태에 따라 다르게 들려온다. 음악은 자연만큼이나 미세한 차이가 감지될 수 있는, 또 다른 예술의 출발로서 매력적인 장르이다. 음악은 어떤 시공간에 푹 젖어들게 하며, 청취자의 감성 대를 재배열시켜 일상의 무딘 감각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어떤 경지에 이르게 한다. 최초의 매혹이 없다면 해석은 기계적 상식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자신에게 익숙한 또 다른 언어가 없다면 매혹으로부터 비롯된 영감은 부질없이 사라질 것이다.
 

화가의 예술적 원동력은 일찍이 생활화한 음악 환경이다. 헤이리 작업실에는 창밖으로 작가가 심은 대나무 숲이 보이는 다방(茶房)이자 오디오 룸이 있다. 어릴 적 아버지가 틀어주던 축음기로 들려오던 음악을 시작으로, 70년대 동숭동의 학교 근처에서 대학 생활을 하면서 ‘바로크’, ‘르네상스’, ‘필하모니’같은 전설적인 클래식 음악 감상실과 ‘돌체’, ‘학림’ 같은 음악다방에서 추억을 쌓았으며, 40대 후반에는 10여 년 간 음악을 테마로 해서 세계여행을 했다. 지금도 작업 중인 작곡가가 연주되는 현장은 찾아다닌다. 작가에게 클래식은 자연스럽게 들려오던 것이었지만, 어느 새 본격적으로 섭렵하는 시기를 거친다. 2000년대 들어서 음악 전문잡지에 시인 이인혜가 쓴 텍스트와 짝을 이룬 그림 100곡을 수년간 그려왔고, 연재가 끝난 후에도 작가가 선곡하여 뚝심 있게 작업을 지속해왔다. 클래식 관련 그림을 연재하기 전인 1990년대에는 ‘한국의 소리’ 시리즈를 70여점 연재하기도 했다. 소리와 음악은 동일시될 수 없지만--소리는 ‘정제되지 않은 음들, 아직 인식되지 않은 음들’(빅토르 주어칸들)이다--음률이 있는 소리와 정제된 음악에 대해 오랫동안 꾸준히 작업을 한 결과가 이번 전시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그러나 백순실이 통상적인 클래식 음악 및 오디오 매니아와 다른 점은 그림을 음악듣기 만큼이나 열심히 했다는 점이다. 매혹적인 것들에 대해 맹목적인 소유나 수동적인 감탄사를 넘어서, 유의미하고 밀도 있는 언어로 재탄생시킬 수 있는 이들은 오직 같은 부류의 예술가들뿐이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 스타일이 ‘규방에서 꼼꼼하게 수놓듯’ 한다고 말한다. 자유로운 음악과 달리, 몸에 무리를 줄 수밖에 없는 꼼꼼한 작업방식과 더불어 작가는 그림 재료와 도구의 효과에 탐닉한다. 큰 화면을 구획하는 담대한 구성과 더불어, 긁고 닦고 물들이고 찍는 식의 세부를 완성하는 여러 가지 효과가 음미할 만하다. 자신의 영감을 따라가지만 한 번에 휙 완성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화면은 단순하면서도 시간차를 두고 만들어진 여러 층위들이 상호작용하면서 우러나는 질감이 있다. 소리나 음악으로부터 출발한 색과 형태는 여러 층위를 이루며 그 중에서 어떤 요소가 전면화 될지는 미지수이다.
 

여러 겹 작업함으로서 도톰해진 화면은 클래식 음악과 더불어 백순실이 꾸준히 해오고 있는 또 다른 시리즈인 동다송(東茶頌)의 화면 효과와 유사하다. 그것들은 중층 결정된 것이다. 그 시리즈는 이 전시의 화려한 색감과 달리 차를 우려낸 색, 또는 차나무가 자라는 대지 같은 색감을 가지지만 독특한 질감은 공유한다. 여기에는 소낙비가 내린 후 땅이 젖은 흙 마당이 알맞게 물러지면 그 위에 그림을 그리곤 했던 어릴 적 체험이 반향 되고 있다. 지열과 함께 올라오던 흙냄새는 차에 관련된 소리, 색깔, 냄새를 가능하게 했을 것이며, 이러한 총체적 공감각이 음악에도 동시에 적용될 수 있다. 1988년 차를 주제로 하여 첫 개인전을 한 후, 지속하고 있는 동다송 시리즈에는 작가가 차밭에서 들었던 빗소리, 바람소리, 그리고 찻물 떨어트리는 소리가 내재해 있다. 동다송 시리즈에서 들려오는 이 ‘영적인 우주의 소리’는 이번 전시에서 가장 정제된 소리라고 할 수 있는 클래식에도 적용된다.
 

이번 전시에서 [Ode to Music 0717, 힌데미트 교향곡_화가 마티스]를 비롯한 몇 작품은 레코드판이나 시디 케이스를 연상시키는 정사각형 캔버스에 그렸다. 정사각형 캔버스는 이데아의 세계가 떠오를 만큼 완벽한 질서를 상징하는 듯하다. 자연이나 예술가의 정념으로부터 탄생했지만 엄밀한 형식을 거쳐 완성되는 음악, 그것을 형상화한 미술작품은 추상적이다. 작가가 ‘나의 첫사랑’으로 꼽는 차이코프스키는 ‘선율의 천재’로 작품 속에서 붉은 꽃의 무리나 사람의 다리들 같은 선적 요소로 표현된다. 선은 역동적인 화면을 결정하는 주요 요소이다. 선에 의해 구획된 면을 다양한 디테일이 살아있으며, 대비가 강한 색채들로 채워진다. 이번 전시에 많이 포함된 베토벤의 음악은 고전음악에 대한 작가의 선호를 보여준다. 작품 [Ode to Music 1404, 베토벤 교향곡 No7]에서 둥글게 휘몰아치면서 배경을 메우고 있는 색은 빙글빙글 돌아가는 무도회의 활기가 느껴지고, 그 위에 뿌려진 작은 꽃잎 같은 포인트들은 강약이 공존하는 음악을 형상화한다.
 

작품 [Ode to Music 1410,베토벤 3중 협주곡 c장조 Op56]에서 화면 한가운데 조각보 무늬 같은 형태 안에 똑같은 강도로 그려진 세 개의 색은 세 가지 악기들의 강도가 똑같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작품은 이러한 분석적 청취보다는 음악에 대한 전체적인 느낌의 산물이기에, 곡명과 작품을 일대일 대응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그렇지만 최초의 출발에 대한 단서는 남아있기에, 각 작품의 차이는 확보된다. 작가는 음악 전문지의 연재를 통해서 자신이 크게 선호하지 않는 음악까지 작품화 한 바 있는데, 새로운 것에 열려 있으려는 이 탐구적 자세는 반복 속에서 차이를 길어 올리게 하였다. 전시에는 말러, 브람스, 쇼팽, 모차르트 음악이 등장하며, 음악적 구성과 회화적 구성을 일치시키는 커다란 면 분할과 작품마다 다르게 적용된 이질적 세부들이 특징이다. 작품 [Ode to Music 1416,쇼팽 녹턴No27-1c#단조]처럼 아래에서 굵은 빛줄기 또는 물줄기가 솟아오르는 듯한 화면이나 [Ode to Music 1407,브람스 교향곡 No3]처럼 화면 중앙을 가르는 갈매기 같은 형상이 상승하는 힘의 방향을 암시하는 작품은 동다송 시리즈에서의 잔잔함과 구별된다.
 

음악과 미술이 모두 추상이긴 하지만, 계절에 따른 자연의 기운과 중력, 원근감은 내재한다. 작품 [Ode to Music 1414, 모짜르트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위한 심포니아 콘체르탄테 K364]에서 추상적 화면 아래에 원근감을 보유하는 마름모꼴의 배치는 저편에 있는 음악의 세계로 진입하는 입구를 예시하는 듯하다. 차의 깊은 맛이나 차나무가 자라는 대지를 연상시키는 동다송 시리즈같이, 커피를 비롯한 여러 재료의 적용에 의해 두툼해진 중층적 화면은 추상적인 음악에 실재감을 부여하며, 그중에서 어떤 가닥이 잠재성에서 현실성으로 전화될지는 그 그림을 보고 듣는 이에 따라 달라지는 미지의 것이다. 빅토르 주어칸들은 [소리와 상징]에서 음악적 음의 본질의 역동성은 거기에 없는 어떤 것과의 관계에 있다고 본다. 우리는 앞으로 올 음을 향해서 그 쪽으로 향해 있으며 그것을 향해서 듣는다는 것이다. 백순실의 작품에서 다양한 재료와 도구를 이용하여 만든 화면은 특정한 색과 형태로 환원될 수 없는 미묘한 것으로, 들을 때마다 달리 들려오는 음악을 입체적으로 표현한다.
 

작품에 떠오르고 가라앉는 여러 요소들은 어떤 상징으로 고정될 수 없는 전(前)언어적, 초(超)언어적 언어로서, 육체와 감성을 직접적으로 표출한다. 예술의 심연으로 뛰어든 자만이 건져 올릴 수 있는 초이질성은 사회에 널리 통용되는 보편적 상징질서와 다른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게 한다. 백순실의 작품은 뭉글뭉글한 무의식의 세계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절도 있는 구조와 구성의 감각이 공존한다. 이러한 감각은 힘찬 화면분할로 나타나곤 한다. 그것은 시간을 축으로 한 어떤 나아감 역시 가능케 한다. 빅토르 주어칸들은 미지의 세계를 풍요롭게 하는 음악의 새로운 차원은 낭만주의자들이 보았던 초감성적이며 초월적이고 꿈과 같은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시간이며 말이 나타내는 모든 것이며, 흐르고 형성되어 가며 변화하고 움직이는 모든 것이다. 음악과 함께 시간은 이미지의 세계에 들어왔고 음악에 힘입어 시간을 바라볼 수 있다. 여기에서 시간은 경험의 질서와 형식이다. 음악에 있어서 주요한 시간적 표지는 리듬이다.
 

[소리와 상징]에 의하면 음들 하나하나는 단순히 시간적으로 연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리드미컬한 구조와 효과에 따르는 체계이다. 리듬은 우주를 지배하는 보편적인 법칙의 하나로 나타난다. 회화에서의 리듬 감각은 뭔가 쌓이고 성장함과 연결된다. 작품 속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유기적 총체성은 클래식 음악이 온전하던 자연 시대의 산물임을 일깨운다. 박자 또한 시간이 창조한 것으로, 박자를 경험하는 것은 시간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간 체험은 관객의 시각 뿐 아니라 몸을 활성화시킨다. 음악은 회화적 공간을 공명하는 장의 세계로 만들면서, 보는 것을 보는 것으로 끝내버림으로서 획일성과 상투성을 낳는 현대의 시각 관습을 위반한다. 시청각, 그리고 동다송 시리즈에 나타나는 후각과 미각의 체험까지, 백순실의 그림은 공감각의 무대가 된다. 여기에서 오감을 하나로 집약시키는 것이 촉각이다. 원초적 질료나 대지를 연상 시키는 촉각적 화면은 그 매개가 된다.
 

촉각-맛-냄새-청각-시각으로 서열화 된 감각에서 오른쪽으로 갈수록 자연적인 육체와 점점 멀어지는데, 마샬 맥루한은 [구텐베르크 은하계]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감각이 작용하기 위해서는 각 감각을 통합시키는 매개로 촉각을 강조한 것을 인용하면서, 촉각에 의한 지각을 완전에 가까운 감각이라고 본다. 보이는 소리, 들리는 색채를 넘어서, 소리와 색이 만져질 수 있다면 얼마나 환상적일까. 백순실의 작품에서 불연속적인 다층적 화면이 만들어내는 촉각성은 공감각(synesthesis)을 추동한다. 공감각은 심리적일 뿐 아니라 물리적인 과정이다. 가령 색의 파장과 소리의 진동수가 연결될 수 있다. 마가레테 브룬스는 [색의 수수께끼]에서 색의 수를 세는 것은 우리의 감수성에 달려있음에도 불구하고, 뉴턴이 [광학 이론]에서 무지개를 7개의 색으로 규정한 것은 서양음계 7음과의 유사성을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백순실의 작품은 여러 감각들 간의 심리적이고 상징적인 조응 뿐 아니라, 재료와 도구의 실험을 통해 감각들 간의 전이를 객관화한다. 그것들은 분리 불가능한 것들을 분리하려는 근대적 노력 이후에 다시 찾아온 통섭시대의 감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