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울림, 베토벤과의 대화



최병식 
미술평론가, 경희대 교수 

작가 백순실이 베토벤(Beethoven, 1770-1827)을 주제로 선택한 이유를 물었더니 ‘휴머니티’라는 간단한 단어로 요약했다. 이번 신작 14점 중에서 베토벤 주제 작품은 10점으로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 중 교향곡이 4점으로 200호 대작이다. 그 외에도 피아노협주곡 5점, 바이올린협주곡 1점이 있다.

 

베토벤을 해석하는 방식은 제각기 다를 수 있다. 사전적 의미와는 달리 결국 각자의 삶과 감성이 개입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백순실이 말하는 ‘휴머니티’를 구체적으로 풀어갈 수는 없겠지만 베토벤이 자신에게 닥치는 혹독한 시련을 껴안으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인간 본성과 삶에 대한 격정적 예찬, 초월의 세계로 나아가는 장엄에 대한 존경으로부터 출발한 것으로 여겨진다.

 

베토벤의 음악은 고전의 세계가 심연에 자리하고 있으면서도 인간의 고뇌를 담는 진정한 웅변과 크레센도(Crescendo), 즉 점점 고양되는 곡의 흐름에서 고전과 낭만이 함께 녹아있다. 음악의 혁명가라 불리우는 만큼, 도전적인 정신도 있지만 청각장애를 딛고 불굴의 의지를 실천하면서 화해로 나아가는 예술 혼 역시 많은 작가들에게 있어 충동과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백작가는 ‘동다송(東茶頌)’시리즈 이외에도 15년 동안 ‘음악에 바치는 송가’라는 의미의 ‘Ode to Music'시리즈를 제작해왔다. 이번 작업들은 대체적으로 일관된 스타일과 밀도를 구사하는 ‘동다송’에 비하여 작품마다 새롭게 구성된 소재, 색채, 형상적 변화가 있다. 마치 새로운 언덕을 넘으면 전혀 다른 풍경이 나타나듯이 한 곡 한 곡마다 매우 다양한 음악 풍경을 생성하는 독특한 스타일을 형성한다.

 

평생 차를 즐겨하는 작가의 스타일에서는 다소 의외의 면모이다. 무수히 반복된 관류를 통해 경지를 추구해가는 시간사유의 형태와는 달리 작품마다의 새로운 심상필름들이 새롭게 구성되고 있다.

 

이번 고려대학교 박물관 전시의 신작들의 변모는 ‘간결’과 ‘천착’이다. 즉 이전 작품들에 비하여 형상의 생략과 비정형적 요소가 증가되었다. 수직적인 화면의 간결함도 인상적이다. 단호한 면의 분할과 화면의 재구성 역시 많은 차이를 지닌다. 스케일은 확대되고, 화면의 변화는 더욱 극적인 면모가 있다. 베토벤의 ‘진지함과 초월’의 화두를 풀어가는 영향 역시 적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음악의 여정’을 매듭지어가는 심리적 변화를 읽을 수 있는 변화이다.

 

사실, 클래식에서 수없이 변화하는 각 악장간의 음률, 심오한 음의 철학을 어떠한 방식으로 시각화 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의문이 많았다. 작가는 곧바로 답한다. “그냥 통 채로 몰입할 뿐입니다” 분석이나 전문지식도 중요하지만 조건 없는 교감과 동화를 통해 ‘영혼의 울림’으로 이어지는 시각적 자유를 구사한다.

 

그러나 주제인 음악과 별개의 감상적 자세도 가능하지만, 작품 주제가 음악을 대상으로 한 이상 감상자에게는 대상음악을 이해하는데 어느 정도의 노력이 필요하다. 아래 두 곡의 교향곡에서도 예를 들었지만 음악의 세계와 더불어 어떻게 작가의 관점으로 해석되고 있는지 단편적으로라도 그 이해가 필요하다.

 

ㆍ「2016 Ode to Music1602 베토벤 : 교향곡 제2번 D장조 op.36」은 작품 배경에 핑크 바탕으로 환희에 찬 분위기를 연출하면서 직선들이 몇 가지 색채로 사선절단을 한 채 세워져있다. 해석관점의 하나일 뿐이지만 직선면의 사선각도와 배열에서는 베토벤의 ‘방황’과 ‘결기(結氣)’, ‘승화’, ‘환희’등의 ‘음형(音形)부호’를 연상하게 된다.

 

이 곡의 배경은 1802년 베토벤이 귀에 이상이 생겨 좌절감을 느끼고 하일리겐 슈타트(Heiligenstadt)에 가서 요양하는 시기이면서 줄리에타 귀차르디(Giulietta Guicciardi, 1782-1856)로 부터 실연을 당하여 유명한 ‘하일리겐 슈타트 유서(Das Heiligenstädter Testament) ’까지 남기는 극도로 어려운 시점이었다. 그러나 알레그로의 피날레에서 들을 수 있듯이 이러한 절망을 극복하고 초월해가면서 화해와 환희로 나아가게 된다.

 

백순실의 교향곡 2번은 해석방식이 이색적이다. 유서까지 남길 정도로 극단적인 비탄에 빠진 베토벤이 다시 스스로를 극복하고 환희에 찬 장면으로 승화된 활기찬 음색 건반조형과 그 긴장감들을 만나게 된다.

 

ㆍ「2016 Ode to Music1603 베토벤 : 교향곡 제4번 Bb장조 op.60」은 식물형상들이 블랙 톤으로 추상화되었고 옐로우 컬러가 배경으로 처리되었다. 이 작품은 희미한 꽃 점으로 이어지는 우미함이 있으며, 교향곡 2번의 직선적 요소와는 다른 부드러운 낭만적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음악 내용과 오버랩 된다.

 

1806년 베토벤의 나이 36세에 작곡된 이 교향곡은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에 제작되었으며, 여성적인 우아함과 낭만적 감정을 연출한다. 요세피네 폰 브룬스비크(Josephine von Brunswick, 1779–1821) 와의 사랑의 시기이며, 명랑한 미뉴에트(minuet), 순수성, 반전과 위트, 현란함 등을 느끼게 한다. 교향곡 3번 ‘영웅’ 5번 ‘운명’과 비교할 때 중간에 위치하면서 매우 여성적이라는 평을 받는 작품이다.

 

우연의 일치일지 모르지만 이번 고려대학교 박물관 출품작 중 베토벤 교향곡은 2, 4, 8번을 선택하였다. 그 의미는 구작 7번을 제외하고는 모두 짝수이며 대중적으로는 선호되지 않는 곡들이다. 반면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교향곡 3번 ‘영웅’, 5번 ‘운명’, 7번과 9번 ‘합창’과 대조적이다. 일반적으로 홀수가 진취적, 격정적이며, 투쟁적인 요소를 지녔는가 하면 백순실이 선택한 짝수 곡들은 우아함, 유머, 서정, 감성적인 면을 많이 담고 있다. 수십 년간 음악을 벗해온 백작가의 이러한 선택은 어쩌면 잠재적으로 그녀의 세계관과 이어지는 한 요소일 수 있을 것이다.

 

백순실의 음악주제 작업들은 2002년 음악잡지에 연재된 『시인이 읽고 화가가 그리는 영혼의 클래식』이라는 작업을 통해 본격화 된다. ‘Ode to Music'시리즈로 이름 붙여진 작업들은 100여점에 달하는 다양한 클래식 주제작업을 진행한다. 형식은 교향곡, 오페라, 소나타, 합창, 아다지오, 협주곡 등 전 세계 클래식 음악의 대부분의 장르가 망라되었다.

 

이러한 작업형식은 그 이전 이미 20대의 나이에 시작되어진 ‘동다송(東茶頌)’시리즈와는 대별되는 양대 시리즈로 자리해왔다. ’동다송‘은 1980년대 접어들어 본격화된 작업 이었으며, 1988년 그로리치화랑 이후 40여년 가까이 진행되어왔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백순실의 ‘Ode to Music'시리즈는 ‘동다송’으로부터의 외출이다. 작가 스스로도 두 시리즈의 독자성, 혹은 융합가능성에 대한 새로운 국면을 고심하고 있다. 그 맥락의 하나로 이번 전시에서는 1992년, 2011년 ‘동다송(東茶頌)’이 ‘Ode to Music’과 동시에 출품된다.

 

두 점은 음악시리즈와는 간접적이면서도 한편 연속적 호흡이 있다. 세필이 유희된 섬세한 관류와 기다림의 공간이 있는 ‘동다송’ 에서 오히려 주제화된 음악에서 느낄 수 없는 무한 자유가 있다. 음악이 화려한 외출이라면, ‘동다송’은 백순실의 심상을 이어오는 생태적 토양으로 관념화된 ‘흙’이다.

 

이번 전시에는 베토벤 외의 랄로, 윤이상, 칼 닐센, 비에니아프스키, 비외탕, 브루크너, 차이코프스키, 말러, 쇼팽 주제 작품도 출품되었다. 그 중「2016 Ode to Music1606 브루크너/교향곡 제7번 E장조」는 1883년에 완성된 곡으로서 특히 2장에서 튜바(tuba)를 통해 바그너(Wagner, 1813-1883)의 죽음을 추도하는 비통한 내용이 담겨있는 점이 독특하다. 그러나 3악장에서 익살이 섞인 야성적 스케르쪼(scherzo)를 반복하여 진행하였으며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백순실의 작업에서도 화면 아래에 깔린 검은 곡선들의 선조와 윗부분의 색채 구성을 통하여 이와 같은 감정의 다양성을 반영하고 있다.

 

백순실의 작업은 전체 작업의 기법적 특징을 지닌다. 베토벤, 브루크너, 시벨리우스 어떠한 작업에서도 그녀는 마치 매우 작은 찻잎들이 모래알처럼 스며있는 듯 화면의 디테일을 구축한다. 바탕색 또한 일반적인 아크릴이나 유채의 질료 느낌과는 완연히 다르다.

 

수묵의 발색과 한지의 일체화된 물성의 만남을 경험한 20대 작업과정의 경험을 바탕으로 10여회 반복된 자연스러운 색의 쌓임과 발효가 있다. 다소 간접적이겠지만 오랫동안 판화에 몰두해온 배경 또한 섬세한 디테일을 구축해오는데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미술을 사랑하고 영향을 주고받은 음악가로서는 음악의 인상파라고 불리 우는 드뷔시를 비롯하여 생상스, 리스트 등 많은 대가들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아직 ‘조형예술로 보는 음악’의 세계는 생각보다 희귀하다. 백순실 작가의 경우는 자신 역시 음악에 심취하여 세계 여러 나라의 여행을 떠나고, 동호인들과 함께 직접 작은 음악회를 개최하는 등 클래식과 시각예술의 만남을 시도해왔다는 점에서 체감적인 작업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차와 클래식 음악, 백작가의 두 가지 심취는 매우 다르면서도 융합의 실마리가 무한하다. 전혀 이질적일 것 같은 양대 문화의 정수들을 어떻게 백순실의 교향악으로 연계해 갈 수 있는지, 여백으로 머금은 차 한 잔의 악보를 남겨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