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순실 - 내면으로 들어가는 소리의 형상화



박영택 
미술평론가, 경기대 교수 

모더니즘은 미술에서 미술 외적인 요소를 배제시키고자 한 시도다. 그러니까 문학적이고 조각적인 요소를 미술 안에서 부단히 지우고 미술 그 자체만을 추구하고자 한 것인데 그에 따라 재현을 거부하며 미술 자체의 조형요소와 절차를 탐구하는 순수기호로의 길, 추상과 사물로의 길로 귀결되어 갔다. 20세기 초 재현주의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초기 모더니즘 미술은 그 방편으로 보이지 않는 세계, 음악의 세계를 시각화하고자 했던 적이 있었다. 소리는 전적으로 비가시적 세계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소리의 사전적 정의는 ‘물체의 진동에 의하여 생긴 음파가 귀청을 울리어 귀에 들리는 것’이다. 이 개념어는 자연적인 소리와 인간의 의해 창조된 인위적인 소리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원래 소리란 물체의 진동에 의하여 생긴 은파가 우리의 귀청을 울림으로써 들리는 현상인 만큼, 모든 소리에는 그 원천이 되는 진동하는 물체가 전제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소리를 들을 때면 저절로 그 소리의 원천인 생명체나 물체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마련지만 소리의 근원이 되는 물체의 이미지의 연상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바로 악기, 악기로 이루어진 음악이다. 악기의 음은 일종의 언어적 기호와도 같기 때문이다. 정작 우리가 음악에서 듣는 것은 시간의 지속 속에서 이루어지는 음향의 조합이다. 물론 그 음향의 조합은 청자에게 부단한 이미지를 연상시켜주기도 한다. 모더니스트들은 그런 이미지를 시각화 하려고 시도한다.

 

백순실은 오랜 시간 비가시적 세계를 시각화하는데 몰입했던 이다. 그렇다고 모더니즘의 특정 논리(평면성 등)에 입각한 작업보다는 자신의 특별한 관심, 취향을 소재로 해서 이를 추상화하는데 관심이 컸다고 본다. 작가가 전문적인 수준에서 즐기는 차와 음악은 미각과 청각이라는 고도의 절대적 감각 세계인데 이를 시각화하려는 시도가 그간의 작업이었다. 미각(차)과 청각(음악)이라는 이 두 감각을 시각과 결합시키고 대상 없는 그림을 시도하면서도 가시적 세계에 저당 잡힌 재현주의에서 벗어나려는 의도에서 추구되는 그림이었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차는 동양의 오랜 문화적 전통 아래 길어 올려 진 깊고 심오한 세계이고 작가가 매개로 삼은 음악은 인간의 감정과 정서를 극한으로 끌어올려 청각으로 구현한, 서구의 역사적인 명곡들이다. 다소 상이하고 극단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이 두 세계는 모두 깊은 심연 같은, 고도의 감각을 거느리고 있다. 그것은 시간의 숙성과 훈련, 연마를 요구하는 감각에의 길이다. 작가는 그 모종의 심연을 시각화하고자 하는 욕망이 자리하고 있어 보인다.

 

근작은 특히 클래식 음악의 세계에 대한 몰입과 그로인한 감동을 평면의 화면 위에 연출하는 시도를 적극 펼치고 있다. 백순실의 회화는 특정 음악이 자신에게 불러일으킨 정서적 무늬, 환시적 이미지를 시각화, 물질화 하려는 시도다. 음악과 회화가 만나 이룰 수 있는 상승작용을 고려하는 것도 같고 인간의 감정과 정서를 이완시켜 주고 해방시켜 주며 분위기에 젖게 하는, 인간의 상상력을 드높이고 확장시키는 음악을 적극 수렴하고자 하는 의도일 것이다. 그림이 구체적인 형상에 제한된다면 그래서 그만큼 감상과 상상력의 폭이 좁아질 것이기에 그 덫에서 빠져나가는 한 방법의 하나는 음악을 매개로 하는 회화적 작업이 된다.

음악은 ‘시간 속에 펼쳐지는 시간 예술’이다. 음악은 “시간과 함께 하는 어떤 것”(주커칸)이다. 청각은 외부의 자극에 의해 받아들인 감각인데 사실 우리가 의식하고 있는 모든 느낌은 이미 과거에 관한 것들이다. 생리심리학의 연구에 의하면 자극 받은 감각을 의식하는데 0.3초~0.5초가량 걸린다고 한다. 결국 감각, 시간 역시 우리의 마음, 뇌의 활동에 의지하는 것이다. 소리의 가장 큰 특징은 그것이 오로지 시간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물론 격렬하게 사라지는 찰나의 시간, 그래서 망각과 기억의 기로에서 말이다. 소리는 사라지려고 할 때만 존재한다는 특성을 지닌다. 하여간 소리는 시간과 공간을 극복할 수 없다. 애초에 소리가 있었지만 이후 기억의 보존에 탁월한 장점을 지니고 있는 듯한 문자가 등장하면서 문자 문화는 급속히 소리 문화를 지배했다. 그러나 월터 J. 옹에 따르면 소리에는 ‘내면성’이라는 특성이 있다. 그러니까 사물의 내부를 확인할 수 있는 인간의 유일한 감각은 청각이라는 것이다. 오감 가운데 시각적인 것은 망각이 빠르지만 청각적인 것은 기억에 가장 오래 남는다고 한다. 세계와 대상이 시각 안에 포착되는 순간이란 그것이 내면세계가 아니라 표면적인 현상 세계의 일부로 급속히 귀속되어 버린다. 그러기에 우리는 시각으로는 결코 내면세계를 볼 수 없고 알 수 없다. 그러니 무엇이든 내부 세계를 알고 싶으면 그 속에서 울려나오는 소리를 들어보아야 한다고들 말한다. 그런가하면 통합적인 것이 아니라 분리되는 것이기에 이성의 힘이 필요한 시각에 비해 청각과 소리는 통합적이고 감성적이며 인간의 마음을 결합시켜주는 신비한 힘이 숨어 있다고 인식되기에 소리는 감정을 전달하는 최적의 수단이 된다.

 

음악은 처음부터 어떤 물질적 지시 대상에 속에 있지 않기 때문에 정신과 감각의 유추 및 암시가 가능한 상징적 공간을 가지고 있다. 음악을 듣는 행위는 바로 그 공간을 통해 현실 세계의 경계를 넘어 미지의 무한한 세계로 향하는 것과 같다. 백순실이 음악에 몰입하고 그것을 다시 보이는 것으로 되돌려 보내 타인과 공감하고자 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표면보다는 내면에 대한 깊은 관심의 표명으로 인해서일 수도 있다. 작가는 독실한 기독교인인데 모든 종교는 내면의 소리를 추구하고자 한다. 시각에 의존하지 않고 내면의 소리로 삶과 우주를 바라보고자 한 것인데 이것이 작가에게는 음악과 종교, 미술이 하나로 맞물려서 응고될 수 있었던 지점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럼 왜 오늘날 다시 청각이 중요시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간 서구의 합리주의, 형이상학적 사고의 전통 속에는 시각에 대한 맹목적인 집착이 깔려 있었다. 따라서 최근 오랫동안 상대적으로 망각되었던 청각과 소리의 의미를 재음미에 하며 고립된 사유의 주체로서의 인간 이해의 틀로부터 벗어나는 가능성으로서 청각적 사고, 청각적 존재론을 시도하고 있음을 본다. 인간 존재의 지극히 원초적인 감각현상인 소리와 듣기는 나로 하여금 시각적 감각 체험과는 달리 세계와의 친밀감 속에 묶어둔다. 보는 주체에게 있어서 대상과의 일직선적 거리가 필연적이라면, 그리고 이러한 거리감이 인간의 사유를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이라면, 소리의 울림은 주체를 빙 에두르고, 주체와 대상의 대면이 아니라, 주체와 그에게 밀려드는 환경, 그 둘 간의 융합을 낳는다고 볼 수 있다. 청각적 사고가 시각적으로 편향된 합리적 사고를 낳고 강조하는 거리감과 고립에 대한 대안과 극복의 메타포일 수 있는 이유다.

 

본래 소리란 고대 그리스 이래 전통적으로 음악에 붙어 있던 ‘악마적이고 초자연적인 힘’의 이미지로 또는 ‘정신성’과는 상반되는 부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었다. 음악은 전통적으로 인간의 정념에 직접 작용하는 것, 음악의 힘은 오로지 인간의 비합리적 영역에 호소하는 것이었다고 본 것이다. 그러다가 근대에 이르러 감성에 나타나는 무질서하고 다채로운 현상이 정신의 작용에 의해 일종의 통일을 가지는 것으로 인지될 때 그 대상은 미가 된다는 인식으로 인해 음악미학이 성립되고 이른바 예술(ART)로 승격 되었다. 이른바 클래식 명곡은 그렇게 해서 탄생했다. 정신과 관련된 측면을 강화해가는 것이 음악의 입장에서 자신을 진정한 예술로 평가받기 위한 유일한 길이 된 것이다. 이는 미술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음악이든 미술이든 그 작품을 정신적 산물로서 인식하고 감상하는 것은 근대에 와서 비로소 가능한 일이었다.

 

백순실은 특정 클래식음악을 주제로 삼았다. 구스타프 말러(1860~1911)의 교향곡이 그대표적이다. 그 외에 모자르트, 멘델스존, 브람스, 베토벤, 안톤 브루크너, 슈만, 시벨리우스, 차이콥스키 등도 있지만 말러의 전 교향곡(1~9번)이 근작의 핵심이다. 전체적으로 ‘Ode to Music'시리즈다. 백순실은 이미 말러의 「대지의 노래」(2014)를 석판화로 제작한 바가 있다. 이후 2014년에 캔버스 작업으로 출현한다. 말러는 이른바 리트와 교향곡, 이 두 장르에만 제한하여 창작한 이다. 말러의 주요 창작분야는 오케스트라를 대상으로 한다. 그는 과거 교향곡의 악장 개념을 파기하는 한편 사람의 목소리와 악기의 음향이 조화를 이루며 새로운 형태의 음악을 창출하게 되는데, 그런 이유로 감상자의 관심을 가장 고조시켰다고 지적된다. 또한 말러 음악의 특징은 화성적 기능에 있기보다는 ‘절박한 심리적 고백의 의미’가 있다고 하는 데 이는 그의 음악이 순수 음악적인 차원에서 이해되기보다는 문학적 내용을 연상시키는 이야기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뜻한다. 그가 활동을 시작하던 19세기 말엽은 거대한 표제 음악의 시기였기에 말러 역시 시적 이미지와 관념들의 영향을 받으며 교향곡을 작곡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 평자들은 말러의 교향곡을 현대 장편 소설에 비유한다. 이른바 인간 존재를 총체적으로 표현하려는 희망이 그의 음악 전체를 일관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말러는 문학과의 친화성을 무의식적으로 강조하면서 개인의 실존적 의미를 우주와 하나로 묶고자 했다. 아마도 이런 말러의 음악이 백순실의 작업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으리라고 보여 진다. 그것은 그만큼 말러의 음악이 작가 개인이 추구하는 의도와 부합되거나 이를 이미지화하기에 용이한 측면이 있다고 볼 수 있지는 않을까? 한편 아도르노는 말러의 음악은 예술가의 이의도가 작품에 그대로 관철될 수 있다는 허구에 사로잡히지 않으며, 오히려 의도라는 범주가 반성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니까 말러의 음악은 말러라는 작가의 의도와 지향점에 따라 그것에 종속되어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의도 자체를 다시금 반성적으로 의도로서 드러내고 작품의 재료로 삼는 것이다. 또한 말러는 기존의 재료를 조작하는 방식이 새로움을 보여주면서 기존의 것에 대한 의문과 회의를 나타냈다고 지적한다. 아도르노(『말러-음악적 인상학』)에 따르면 말러는 더 이상 통용될 수 없는 고전적 이데올로기를 거부하고 당시 산업 사회라는 공허하고 거대한 세상에 대한, 인간이 기계 부속처럼 맞물려 들어가 있는 세계 운행에 대한 대응 방식이라는 것이다. 말러의 주안점은 개별 부분들을 어떻게 만들고, 그에 따라 각 부분에서 어떻게 강렬한 이미지를 제공할 것인가 하는 점에 있었지, 전체 구성 같은 것은 별 상관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말러의 음악은 오로지 세부의 두드러진 부분에만 귀를 기울이는 청취법, 만화경처럼 눈앞에서 전개되는 음의 두루마리에 오로지 몸을 맡기는 청취법, 무한한 놀이를 계속하는 듯한 청취법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말러 음악이 지닌 진정한 현대성이자 현대미술과 공유할 수 있는 접촉면이 되기도 한다.

 

백순실은 무엇보다도 “음악에 통째로 몰입”하고자 하며 조건 없는 교감과 동화를 통해 영혼의 울림으로 이어지는 시각적 자유를 구사하고자 했다고 말한다. 음악을 들은 이후에 남은 잔상과 이미지를 떠올리는, 사후적인 기억을 더듬는 작업이다. 커다란 장방형의 캔버스 표면에 아크릴과 유채로 이루어졌지만 다양한 재료 실험이 바탕에 깔려 이미 풍부한 질감과 풍성한 표정을 지닌, 그것 자체로 이미 회화적인 화면을 배양한다. 무엇보다도 코스 퍼미스 젤(Golden Coarse Pumice Gel) 등의 여러 미디엄을 통해 바탕에 오돌 도돌 한 요철효과를 자아내고 있는데 그것이 작은 자갈이 깔린 대지를 강하게 연상시켜주고 촉각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그 위로 강하면서도 기하학적인 화면 분할, 원형과 직선, 면, 사선과 특정 자연 풍경을 연상시키는 형상이 얹혀 지고 부드럽게 착색된 색채들이 깔리면서 중후하고 견고한 물질로 구현된 음의 응고물이 가시화된다. 이는 다분히 원초적인 미감과 무의식의 지층에 깔린 다양한 기억의 침전물에 기인한 취향의 산물인 듯 하다.

 

작가는 어린 시절 과수원을 했던 집안, 그리고 그 공간에서 벌어졌던 다양한 일들, 예를 들어 비가 오고 난 후에 땅에서 풍기는 비릿한 흙냄새, 그 흙 위에 그림을 그리며 놀았던 추억 등을 기억한다. 그래서인지 작가의 그림은 이미 장방형의 캔버스 화면을 수평으로 펼쳐놓고 그 위에 독특한 질감을 일으켜놓은 후에 기하학적인 면 분할과 그 위로 상징적인 이미지를 올려놓는 등 마치 대지가 식물을 키워내는 듯한 이른바 ‘작물적인’ 형상화를 시도한다. 대지와 녹차의 색감 등이 질펀하게 깔리고 사계절의 변화를 예감하는 자연의 색상이 펼쳐지고 음악에서 떠오르는 환영적인 온갖 색이 교차하고 그 사이로 근원적인 생명체의 원형적 이미지, 자연의 모상으로서의 기호들, 음악에서 연유하는 추상적 부호들이 음표처럼 부유한다. 사실 백순실의 회화는 선과 색채, 평면성과 두드러진 질감(부조적인 효과), 추상과 구상의 흔적이 공존하고 색채와 질감, 서정성과 엄격함, 수평과 수직 등 이원적인 여러 요소들이 서로 충돌하고 조화를 이룬다. 그러나 공통적으로 그 모든 요소들은 거대한 수평의 장소성 으로 소멸하듯 가라앉는다. 그것은 거대한 휴지와 휴식, 정지와 고요, 그리고 내면의 침잠을 자아내는 화면구성이다. 동시에 그 모든 것들은 결국 거대한 자연공간으로 수렴되고 있음을 은유하고 있다. 이는 여전히 우리에게 깊숙이 잠재된 전통적인 자연관, 자연주의 예술관과 연루되어 있는 것이라고 본다. 작가의 화면은 고도의 추상적인 음의 세계, 특히 클래식(교향곡)의 음들을 시각화시키고 있는 매우 유의미한 시도이자 시각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청각이란 감각을 화면에 호출해내는 동시에 다양한 재료 체험을 통해 한국화/ 회화의 가능성을 확장시키는 등 여러 측면에서 흥미로운 사례 역시 제공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