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詩



이용우 
미술평론가 

백순실의 작업을 유심히 보고 있노라면 삶과 예술, 예술과 인간의 관계가 자꾸 되뇌어진다.

 
언제부터인가 인간은 일상을 떠나 또 다른 삶의 형식을 찾아나서기 시작했고 그것은 예술이라는 아름답고도 고통스러운 수사학의 이름으로 다가와 우리 주위에 상주해 있다.

 
이와 같은 또 다른 삶은 언어 기능을 지닌 詩的 예술과 표현 기능으로서의 조형미를 주장하며 갈수록 영역을 확장해가고 있다. 우리들의 일상과 예술은 다르다는 것인가.

 
20년의 작가 경력으로 말하는 백순실의 작업 세계는 '현실과 예술'의 관계를 명백하게 등식으로 성립시킨 경우에 속한다. 그의 작업은 詩的 거울이며 예술이란 추호도 우리들의 울타리에서 벗어난 가공적 테두리가 될 수 없음을 설명한다. 가령 예술에서 상상력의 세계를 제외시킨다면 그것은 더 이상 '藝'도 '術'도 아닌 묘사에 그칠 것이나 우리는 상상력이라는 가공할만한 터전을 예술과 공존시킴으로써 보다 풍부한 감수성의 세계를 획득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감수성의 세계는 늘 사람의 그림자처럼 특수한 곳에서만 추상적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을 백순실은 보여 주고 있다. 원래 그림자는 시각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빛이 있어야 존재하는 그림자란 실증적이지 않다. 그래도 그림자는 물체의 색다른 위치와 형식을 규정하는 우리들 기억의 잔영과도 같다.

 
상상력 같은. 백순실의 작업은 '東茶頌'이라는 시적 제목으로 대표된다. 문자 그대로 차를 노래한다는 뜻이다. 그는 전남 광주 출신으로서 우리 전통 차의 주요 산지인 보성 벌교 등지와 이웃하며 살았고 그가 전공한 미술 양식이 한국화였기 때문에 전통과 가깝게 서 있을 수 있었다.

 
서구인에게는 검정색의 이미지로밖에 표현되지 않는 먹(墨)이 우리에게는 한국인의 미의식을 정신적·양식적으로 표현하는 철학적 소재이듯, 조상 대대로 참선의 의식과 함께 해온 녹차도 먹과 비유된다.

 
한국화의 여백이 단순한 공백이 아니듯 녹차도 무수히 많은 차의 종류로 존재하는 소재로서의 차가 아니다. 백순실의 작업이 정신적이고 사유적이며 자연주의적 정서를 보여 주는 것은 소재로부터 추출한 색채와 토양에서 유래된다. 녹차가 단지 마시는 기능의 음료수가 아니기 때문에 격식이 필요하고 그것을 도(道)로 불러 다도(茶道)란 언어 형식이 존재해왔다.

 
백순실 작업에서의 차란 주요 소재로서의 색채와 생명·인내 등이 혼재해 나타나지만, 그것은 차의 형성 과정으로서의 생명 연습이다. 그는 차를 생산시키는 토양과 차 잎사귀의 질긴 생명력, 또는 계절에 맞춰 순응하는 자연의 섭리를 소재에서 유래시킨다. 그러나 그것은 삶의 노래로 다시 치환되어 회화적 형식을 구가하게 된다. 이 형식은 우선 세 가지 유형을 보여 준다.

 
첫번째는 생명을 배태시킨 이미지로서의 산이다. 산은 소극적으로 해석할 때 자연의 큰 집합체일 것이나 그것은 달관을 상징하는 동양사상의 뿌리요 선적(禪的) 구도 세계의 적극적 메시지이다. 산에는 인체가 함유한 원소를 동일하게 갖고 있으며 인간이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루소 이전의 동양적 철학이 담긴 숙명적 오브제인 것이다. 원래 동양에서 산은 삶과 죽음을 모두 포괄한다. 생명을 역동케하는 힘의 덩어리이며 죽고난 뒤 묻히는 곳도 산이다. 산은 삶과 죽음의 가운데에 서 있으면서도 그것을 함께 갖고 있다는데서 매우 시적이다. 따라서 우리의 회화가 갖는 산의 해석이란 다분히 문학적 알레고리와 함께 삶의 문제에 깊게 관련되어 있다.

 
두 번째는 백순실 작업의 색채감이다. 색채란 표현 예술의 의복이겠으나 실제로는 작업의 성격을 규정짓는다.

 
여기서 성격이란 색채의 밝고 어두움, 강하고 엷은 농담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가령 현대 미술에서 어느날 재기된 색채의 비효용성, 비효율성은 미니멀리즘이나 모노크롬 형식과 같은 단일화법을 선사함으로써 미술에서의 색채가 절대적 요소가 될 수 없음을 보여 주었다.

 
여기서 색채의 절제는 오히려 생명의 힘을 극대화시키는 농담의 문제도 더욱 극적인 상황으로 몰입시키면서 분명한 성격을 부여하였다. 색채가 미술의 의복이요, 성격을 규정하는 절대요소라던 종래의 관습은 편의상 불필요한 설명이 되어 버렸다. 백순실 작업 가운데 등장하는 색채는 최근 들어 매우 절제와 효용성이 고려되어 나타난다. 화려하고 강인한 색채를 선사함으로써 형식의 부조화를 이미지로 극복하던 시대가 있었는가 하면 90년대 그의 작업은 역동적으로 색채가 주제와 소재에 먹혀 들어감으로써 보다 구도자적 자세를 취하게 된다.

 
실제로 민속회화의 소재를 제외하는 한국 미술에서 색채지 상주의시대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이것은 민족적 정서와도 함께 하는 것이며, 특히 한지를 사용하는 특질적 미술 형식에서는 더욱 두드러진다. 백순실 작업에서 색채의 절약은 몇 가지 색다른 효과를 가져왔다.

 
그 하나는 주제와 소재의 선명성이다. 다도란 그 형식 자체가 구도적 선적(禪的) 메시지를 갖고 있는 것이며, 다도의 형식이 갖는 침묵 효과는 동양적 명상의 세계와 상통한다.

 
따라서 무겁고도 침묵적인 색채의 도입으로 말미암아 그가 표현하려는 자연적 생명력은 내적인 공감을 일으킨다. 또 다른 것은 모노톤 형식에 가까운 색채와 구성은 그 자신 삶의 색채로 묘사되어 있다. 백순실의 삶은 보색에 가깝다. 그는 도시 한가운데서 살고 작업하고 있으나, 그것은 환경적인 요소일 뿐 그의 마음은 늘 구도자적 입장을 취한다. 이것은 천주교의 신앙에서도 유래하지만 번잡한 것을 절대 회피하려는 동양 회화의 담채와 같은 삶의 색깔을 지니는 것이다.

 
작가란 그의 생각을 하나의 색채로 뭉뚱그려 놓았을 때 보다 구체적 답을 얻게 된다. 서울 시민의 생각을 하나로 모았을 때 서울시의 지도와 같은 형식을 유도해낼 수 있다는 가설과도 유사한 것이다. 이것은 어느 특정인의 색깔, 특정인의 보색이라기보다도 예술과 삶의 형태를 등 식화시킬 수 있는 일체의 것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말하고 그리는 표현 예술의 이중구조 속에는 늘 보색과 같은 교차점이 있기 마련이다. 백순실의 최근 작업에서 나타나는 세 번째 특징 중 하나는 脫 소재, 脫 주제의 선언적 메시지가 드러나는 점이다. '東茶頌'이 매우 일차적 관념어이며 차의 형태나 색채의 표현이 아 직도 군데군데 작업속에 비쳐지기는 하나 이것은 점차 익명의 소재로 치환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가 80년대까지 소재에 충실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우선 차의 동양적 정신성 및 구도자적 정신을 보다 생동감있는 추상 회화로 풀어내려 했었다는 형식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이 추상 이미지를 흡사 '차의 향기'로 서술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관념과 비현실적 모호함으로부터 그는 점차 벗어나고 있다. 오히려 그는 차의 향기보다는 그것을 키워내는 자연의 생명에 더 관심을 쏟고 茶에 비유된 사회성, 茶와 인간, 또는 삶의 카테고리에 관심을 표명하는 것이다. 그래서 차를 노래한다는 원래의 취지는 삶을 노래하는 것으로 주제의 변혁을 꾀하고 있다. 또 동양 정신이 자칫 관념의 유희정도로 잘못 인식되고 있는 서구적 해석에 실체의 것, 치열한 작업 정신으로 맞섬으로 해서 보다 구체적인 것을 구증해 내겠다는 명확한 태도가 나타났다.

 
이와 같은 작업의식은 백순실 예술에서 매우 중요한 현실 인식이며 작업에서의 구체성을 획득해가는 첫걸음이다. 그는 동양의 정신적 관조세계를, 색채를 기본으로 한 추상 이미지로 풀어내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한국화의 전통이 한지와 수묵·담채·석채 등 간단한 재료에 의해 해결될 수 있다고 믿었던 많은 작가들이 했던 방법 그대로였다. 그러나 표현의 다양성, 재료의 다양화 등으로 나타난 오늘날 현대 미술의 미디어 개념은 전통을 한낱 소재나 재료개념으로만 묶어 놓을 수만은 없었다.

 
회화의 입체화, 회화의 설치화 작업이 전통의 훌륭한 계승 발전으로 수행 될 수 있음을 깨달았고 '따블로 시대의 미술'이라는 소극적 패턴에서 확장된 장르 개념으로서의 현실 미술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확신이 다가온 것이다. 그 동안 한지에 온갖 복합재료를 섞어 독자적 효과를 거두었던 백순실에게는 이와 같은 인식이 작업의 다양성과 인식의 확장이란 차원에서 자극제가 될 것으로 믿는다. 이는 일찍이 소재와 재료에서 해방되었던 서구 작가들이 느끼는 '확장'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다시 말해 백순실이 가지는 회화의 무게와 서구 작가들이 느끼는 회화의 무게는 시간과 공간에서 동시적인 것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백순실이 시도한 입체 설치 작업은 회화의 연장 개념이라는 사실이 확연히 드러난다. 그의 입체는 회화의 1차 소재인 한지의 연장이다.

 
평면 개념인 한지를 원형으로 말거나 접어서 지금까지 펼쳐진 이미지의 한지를 입체로 세우고 그 위에 다시 간략한 드로잉이 가해진다. 이 드로잉은 수묵의 한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또 다른 입체는 병풍이나 가리개처럼 펼치거나 접을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동양의 가정에서 전등의 덮개 형태로 존재하는 등(燈)의 사용이다. 이 등은 대개 원형으로 만들어져 그 속에 전구가 들어가고 전깃불이 켜지면 이 등은 빛을 간접적으로 차단하여 밝기를 조절해 주는 기능을 하게 된다.

 
문명 사회의 상징인 전기는 전통의 상징인 한지에 의해 빛의 속도와 세력이 차단되 어 적당한 이미지로 재가공되어지는 것이다.

 
이 위력적인 소재는 백순실의 손을 거치면서 다시 채색되어 여러 개의 원형의 입체로 탄생된다. 관람자는 채색된 구형의 등과 만나고 손으로 만지거나 심지어 발로 찰 수 있도록 관람객의 참여가 유도된다. 여기서 전기는 불을 밝혀주는 도구로서만 존재하며, 현대 사회를 구성하는 동력으로서의 메시지는 갖지 않는다.

 
키네틱아트가 금속 재료를 이용한 동력 수단이 동원되었다면 백순실은 전기라는 동력 수단을 동원하면서도 그것을 예술성 뒤에 잠재우는 또 다른 가설을 전달한다. 모더니즘 시대의 모순 가운데 크게 지적될 것은 아방가르드 정신을 기본 골격으로 하면서도 '재현'의 메시지를 실질적으로 거부해 왔다는 것이다.

 
예술의 오리지널리티는 일회성이나 유일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보편적인 공감대에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보편적 정서는 암호 형식의 복잡한 전달 구조에 의존하지 않고 대중에게도 신선하게 전달되는 예술 언어의 개발에 있을 것으로 예견된다. 예술의 소재나 재료가 아무리 확장된다 해도 결국 작가와 관람자나 소통하지 못하는 예술은 현실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재현이란 모방이 아니라 우리들의 또 다른 모습, 즉 삶과 예술의 절묘한 등식을 설정시키는 소화 기능인 것이다.